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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희 상담사] 고생배틀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긴 하루 끝에 친한 지인 몇과 만나 가진 저녁 자리. 이런 저런 얘기 끝에 힘든 마음을 내려 놓는다. 직장 동료 문제, 풀리지 않는 비자 문제, 집안에서 있던 사소한 말다툼 등. 그저 동정어린 말 몇 마디 바랐을 뿐인데, 지인 중 하나가 갑자기 말을 끊어버린다. “뭐 그런 거 가지고그래. 난 주문이 꼬이는 바람에 하루 종일 운전만 하며 돌아다녔다.”

아, 그래. 너도 힘든 하루를 보냈구나. 이렇게 공감 한 마디만 하고 넘어가면 좋았을 것을, 공감하고 인정하는 마음 보다는 내 마음에 공감받지 못한 서운함이 먼저 치고 올라가 버린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툭 내 고생한 얘기로 받아친다. “야, 넌 운전만 했지. 난 운전하다 중간중간 배달도 했다.” 그리고 내가 배달한 물품들이 얼마나 무거운지, 내 고객들은 얼마나 진상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어때, 내 고생이 더 심하지. 왠지 으쓱해지는 찰나, 친구가 다시 나서서 자기 고객들이 얼마나 더 진상인지 얘기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지인이 하는 말, “언제까지 싸울래? 밥이나 먹자.” 아, 나는 나도 모르게 싸움판을 벌이고 있었나 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남 고생한 얘기를 들어주지 못하는가. 우선은 별 거 아닌 일을 고생이라 벌이는 상대방이 더 깊은 고생의 길로 나가지 못할까 걱정이 되서다. 부모님들이 자주 하시는 “내가 어렸을 적에는, 내가 네 나이때는” 으로 시작하는 고생담이 바로 이런 종류이다. 내 사랑하는 자녀가 작은 고생에 부딪쳐 큰 사람이 되지 못할까봐 걱정되시는 게다. 내 어릴 적엔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다니며 장사를 해 식구를 먹여 살렸고 그러다 화난 고객에게 물바가지도 맞아 봤고 산길에 몸을 웅크리고 자다 객사할 뻔도 해봤고. 시원한 에어컨 밑에 앉아서 전화나 받으면 되는 일이 뭐 힘들다고. 또는 나 고생 좀 해봤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반찬 없어 찬물에 밥말아 먹는 게 뭐 그리 큰 고생이라고. 한 삼일 굶어봐야 고생이란 소리가 안나오지. 하지만 그 무엇보다 큰 것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이다. 어떤 일은 시작 단계에서 부터 기대와 찬사를 받지만, 대부분의 고생은 알아주는 사람 없이 지나가기 마련이다. 하루 세번씩 얼음물에 똥기저귀 빨던 고생을 아기엄마 아니고 누가 알까. 이런 저런 컴플레인 듣느라 종일 구부린 허리의 아픔은 당사자 아니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자식 사랑에, 월급날을 기대하는 마음에 꾹꾹 눌러참은 마음은 내 얘기를 들어줄만한 사람 앞에만 가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내가 이렇게 고생했어.그러니 날 좀 알아줘. 참 어려웠겠다고 인정해줘.


마음을 쏟아낼 곳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인정을 받지 못하면 “고생 해봤자 아무 소용 없어” 하고 비탄하는 마음, 삶의 의욕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우울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으로 누군가가 고생담을 꺼내거든, 그 까짓 거 하고 무시하지 말고, 내 고생이 더 크다고 배틀하려 하지도 말고, 그저 인정해 주라. 어이구, 그런 일이 있었어. 난 몰랐네. 정말 힘들었겠다. 공감해 주면 된다. 그래서 누구든 고생의 쓴물을 들이킬 때 공감의 꿀 한 숟갈이 더해지도록. 아무리 힘든 고생이라도 조금은 삼키기 쉬워지도록.


07/12/2019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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