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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영칼럼] 트라우마와 정체성


인간의 전생애 발달과 자아정체성 연구로 유명한 에릭 에릭슨은(Erik Homburger Erikson, 1902. 6.15 ~ 1994. 5.12) 유태인 엄마와 노르만인 생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생부는 어머니를 떠난 상태였다. 에릭슨이 태어나고 3년 후 어머니는 유태인과 재혼하여 37년간 의부가 생부인줄 알고 살았다. 어려서 유태인학교를 다니며 친구들에게 노르만인이라고 왕따를 당하기도 하였던 에릭슨은 커서 안나프로이드의 연구소에서 전쟁고아를 치료하다가 나찌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 미국 보스톤으로 이주하여 아동정신분석가로서 예일, 캘리포니아 버클리, 하버드에서 많은 연구활동을 하였다.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날 때부터 에릭슨은 엄마의 우울한 눈빛과 불안한 숨결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불신과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몸으로 체득했을 것 같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초기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형성한다는 주장을 토대로 봤을 때 에릭슨의 어린 시절은 트라우마로 얼룩진 삶이다. 그러나 에릭슨은 생부의 부재, 전쟁, 이주민으로서의 소외감이라는 커다란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평생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부적절감과 열등감과 싸워 자아정체성이라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주제는 자아정체감 형성과 관련되며 주로 사춘기 때 자신의 독특성을 구축하고 타인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과업과 대면하면서 나타난다. 자아정체감은 단순히 자신에 대한 수용과 정립의 문제로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부모를 비롯하여 과거 트라우마와의 화해와 용서 그리고 치유를 통해 형성된다. 부모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기 안에서 이상화 되었던 부모와 이별하고 현실적 부모와 만나야 하는 인지적 갈등이 실망감과 분노로 나타날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은 자신의 절대적 존재와도 이별해야 한다. 학교생활, 대인관계, 부모와의 독립을 통해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어린 시절 판타지와 이별하고 현실적으로 부족한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어린 시절 판타지 속의 피터팬을 여전히 부여잡지만 현실의 후크를 보는 순간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피터팬의 밝은 부분으로 포장하고 부모와 현실을 후크의 악마성으로 둔갑시켜 자신을 후크에 의해 학대 받는 피터팬과 동일시 하여 현실을 회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이란 회피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워도 직면하고 극복해야 한다. 성장의 길목에 선 청소년들의 발달과업인 자아정체감 형성은 부족한 자신을 수용하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재구성하는 인지적 통합과정이며 성숙과 확장의 경험이다


‘나의 트라우마가 나를 잡아요.’, ‘엄마가 준 상처 때문에 나는 더 나아갈 수가 없어요.’라는 말은 과거가 나를 잡는 방식이며 내가 도망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울증, 불안증, 강박증, 대인기피증 등 내가 도망갈 수 있는 동굴은 너무도 많다. 모두 나를 피해자로 둔갑시킬 수 있으니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부모의 죄책감은 아이가 나약해지고 싶을 때 가장 잘 보이는 공간이다. 버릇없는 아이에게 했던 잔소리, 큰소리, 회초리 등등 엄마가 했던 많은 부족한 점들이 죄책감이 되어 엄마의 가슴에 맺혀져 있다. ‘내가 그때 너무 큰소리 쳐서 아이가 이렇게 자신감이 없는가?’, ‘내가 그때 너무 엄하게 해서 아이가 이렇게 무기력할까?’ 이러한 자책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에게 구실을 줄 뿐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완벽한 세상은 없다. 부족한 엄마도 아이가 만나야 하는 환경 중 하나이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이기 위해 아이가 싫어하는 음식도 먹여야 하고 올바른 습관을 키우기 위해 야단도 쳐야 한다. 게다가 엄마 자체가 예전에 받은 상처로 가끔 우울하고 자주 불안해 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아빠도 가장으로서 한 집안을 책임진다는 것이 두려워 가끔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술만 마시면 넥타이를 머리에 두르고 수퍼맨이 되는 미숙한 어른이기도 하다. 우리가 처해있는 부모라는 현실은 이렇듯 불안정하다. 애초에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안전한 세상은 없다. 그러므로 성장한다는 것은 상처가 있는 부모와 상처를 주고 받으며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이다. 상처가 승화되고 성숙되어 꽃으로 자라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슬프도록 아름다운 쓴 열매가 된다.


이별의 아픔, 거절의 고통, 소외의 공포 등 크고 작은 상처를 통해 삶은 자주 고단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때 고통은 의미가 된다. ‘나의 고통을 모르니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할 수 있다.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알아서 그럴 수도 있다. 여전히 자신의 고통이 커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간이 필요함을 안다. 그러나 트라우마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아를 조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너는 과거 트라우마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거야!” 라는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은 나를 어두운 동굴에 계속해서 남겨둘 뿐이다. 두려움은 도전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내가 행동하지 않는 이유가 트라우마일 때 트라우마를 극복할 이유는 없어진다.

상처받지 않고 사는 세상은 없다. 조개의 상처가 진주가 되듯 인간에게 주어진 상처도 보석으로 만든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아이일 때 상처 받는 것은 우리 의지로 어쩔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된 지금 상처를 받지 않는 것과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해볼 만한 도전이다.


02/22/2019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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